전남 장성, 한국의 서원 '호남 공자' 하서를 만나다

김정환l승인2019.09.08l수정2019.09.0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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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 한국의 서원 '호남 공자' 하서를 만나다

'장성에서는 학문을 논하지 말라'(問不如長城)는 말이 있다. 뛰어난 학자를 많이 배출한 고장이어서 나온 말이다.

그중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다. 필암서원은 정조가 "해동의 염계(중국 북송 시대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이자 호남의 공자"라 칭했던 김인후를 제향하는 곳이다.

성균관 문묘(文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그의 제자들과 조선의 유학자 18명(동국 18현)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동국 18현 중 유일하게 호남 인물이 있으니 바로 김인후다.

장성 황룡면 맥동마을은 하서가 태어난 곳. 마을 입구 도로변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서 있는데 '筆巖'(필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예부터 붓 모양 산이나 바위가 있는 곳에서는 대학자가 난다고 하는데, 이곳에 바로 붓 바위가 있다. 하서를 모신 서원의 이름도 이 바위에서 비롯했다.

어릴 때부터 문장에 뛰어났던 김인후는 31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이후 세자(훗날 인종)의 스승이 됐다. 그가 설파한 유교 정치의 이상에 감동한 인종은 그 뜻을 변치 말자며 '묵죽도'(墨竹圖)를 그려줬다.

하지만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하서는 고향에 돌아가 출사하지 않고 시와 술을 벗 삼았고 성리학 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했다.

그의 인품은 1560년 명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서 엿볼 수 있다.

실록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淸粹)했다. 5∼6세 때 문자(文字)를 이해해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했고, 장성해서는 시문을 지음에 청화하고 고묘(高妙)하여 당시에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술과 시를 좋아했고, 마음이 관대해 남들과 다투지 않았으며 그가 뜻을 둔 바는 예의(禮義)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감히 태만하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필암서원은 맥동마을에서 동쪽으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세 차례 옮겨지며 1672년 중건된 것이다. 첫 서원은 1590년 황룡강과 문필천이 합류하는 장성읍 기산리의 무등산이 훤히 보이는 풍광 수려한 터에 세워졌다.

하지만 서원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倭)에 의해 소실되고 만다. 왜는 의병의 산실이었던 이곳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인후의 후손인 김경수를 중심으로 모집된 의병이 왜적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서원은 소실된 지 27년 만인 1624년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건축됐고, 1662년 '필암'이란 편액을 받으며 사액됐다. 그러나 1671년 큰물로 모든 건물이 무너졌고 이듬해 현 위치로 옮겨 세워졌다.

임지현 해설사는 "필암서원은 봉황이 임금의 서찰이나 책을 물고 있는 형국인 봉황함서(鳳凰銜書)의 길지에 들어서 있다"고 설명했다.

봉황함서는 중국 주(周)나라 때 봉황이 천서(天書)를 입에 물고 문왕의 도읍지에 날아와 노닐어서 무왕이 그 봉서(鳳書)의 기(紀)를 받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필암서원은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는 성진산 아래 평지에 들어서 있다.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홍살문 옆에는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디딤돌로 사용하는 하마석이 놓여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의 정문이자 휴식처인 확연루(廓然樓)가 서 있다. 층마다 문이 3개씩 달린 팔작지붕 건물로 아래층 좌·우측 문을 통해 드나든다. 가운데 신문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낼 때만 사용한다. 높이가 낮은 문을 드나들 때는 자연스레 고개가 숙어진다.

깔끔하면서도 힘이 있는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해 확 트여 있고 크게 공정하다는 뜻이다. 확연루에서는 넓은 들판과 문필천이 보이고, 서원의 정갈한 건물들이 내려다보인다.

확연루와 유생들이 공부하고 회의하던 공간인 청절당(淸節堂) 사이 너른 마당에는 필암서원의 역사와 함께한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해서 흔히 강학하는 곳을 행단(杏亶)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선 은행나무를 심어 청절당이 강학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단아한 '청절당' 현판 글씨는 동국 18현 중 한 명인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확연루와 청절당은 모두 북쪽으로 확 트여 있고, 남쪽이 막힌 구조다. 건물들이 북쪽에 있는 사당인 우동사(祐東祠)를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김정환  swlss2110@g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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